양성이씨(陽城李氏)가 양성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고려 문종 때 득성한 상주국공(上柱國公) 이수광(李秀匡)이 정난공신으로 책훈되고 양성을 채읍으로 하사받은 사패지지에서 연유된다. 시조의 유지가 양성구내 향교의 곁이라 하며 묘는 그 뒤쪽 몇리쯤에 있었다고 하나 표지가 없어 실전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1838년 안성시 양성면 천덕산에 설단하기로 결의한 후 지금의 평택시 죽백동 산 43의3 유좌(酉坐)지원에 1848년 봉위하여 세향을 받들어 오고 있다. 한편 숭모재는 1968년에 지어졌으며 영정은 1984년에 남계 이규선(李奎鮮) 화백이 그려 서울시 성동구 마장동 459-14 양성이씨 대종회관에 봉안되어 있다.
상주국공 이수광은 서기 1040년대에 송나라에서 특진 금오위대장군 상주국의 작위를 받고 고려에서 삼중대광보국양성군에 봉해짐으로써 득성하였다. 송나라 태생으로 고려에 와 문종조(1047-1083)에 벼슬하여 누차 거란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출중한 인품과 강유겸전한 외교술로 상호이해를 슬기롭게 설득 무마하여 그들의 동침야욕을 봉쇄 선린 우호관계를 맺음으로써 정난공신 1등에 책훈되었고 송나라에 변란이 있어 고려에 구원을 청해오자 왕명으로 원정하여 한달에 3번 승첩을 거두매 송나라 황제가 연회를 베풀고 친필로 ‘고려대신 이수광은 그 공이 천하에 으뜸이요 이름이 후세에 길이 빛나리라(高麗大臣 李秀匡 功冠天下 名揚後世)’고 써 하사하고 위의 벼슬을 내리니 사람들이 모두 영귀공자라 칭송하였다.
특히 이규선(李奎鮮) 화백은 이 영정을 그릴 때 우리 양성이씨 가문이 문무를 겸비한 씨족임을 감안 한번, 두번, 여덟번째 그리는 동안 현몽까지 한 공의 모습을 그리게 된 일대 역작으로 1984년 2월 28일 대종회관에서 영정 봉안을 했다.